There is more behind

토톡 톡, 뇌에서 스파크가 일어난다 - 당신 인생의 이야기 본문

책을 읽어요

토톡 톡, 뇌에서 스파크가 일어난다 - 당신 인생의 이야기

고고V 2019. 7. 3. 21:30

읽는 내내 감탄과 탄성이 이어지고, 그 천재성에 박수가 나온다. 한편으론 뼛속까지 과학자이자 다른 한편으론 상상을 초월하는 창의적인 소설가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할수 없다. 토톡 톡 뇌에서 기분좋은 스파크가 일어난다. 그동안 잠자고 있던 뇌가 기분좋은 자극에 깨어난다. 

<바빌론의 탑>
성경에서 바빌론의 탑은 인간의 오만과 야훼의 분노, 그리고 언어의 탄생으로 요약할 수 있다. 소설에서는 조금 다르게 바빌론의 탑에 접근한다.

몇세기에 걸쳐 탑을 쌓고, 달과 해를 지나 하늘의 천장에 다가간다.  아니 산소는? 내가 알고있는 성경적 사실이 이 소설이 sf라는걸 잊게 했는지 너무 진지하게 다가가다 달을 만나며 현실과 소설을 분리시킬수 있었다. 뭐든가능한 소설의 세계라고 인정하고 힐라룸을 따라 계속 하늘로 올라간다. 

하늘을 파서 올라간다. 아니. 하늘을 판다고? 그래 sf니까. 
힘들게 힘들게 수백년에 걸쳐서 탑을 쌓아 올라갔는데, 하늘 너머에 있는 것은 바빌론에서 쉽게 왕래할 수 있는 바빌론 근처 사막이었다. 탑을 쌓는 것은 야훼에 대한 도전이었다기 보다는 야훼의 위대함을 확인하는 과정이었고, 그래서 야훼는 하늘을 뚫고 계속 올라가도록 허용했던것 이다. '아무리 오랫동안 여행을 해도 인간은 결국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p51)' 

<이해>
신비의 약물로 초천재가 된 그레코, 그레코를 보며 비슷한 영화가 생각이 났다. '루시' 그리고 '마녀'
루시는 뇌사용량이 늘어나며 엄청난 지식을 흡수하고, 인류와 우주의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사라진다( USB가 됨...;;). 마녀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초천재를 만들면 그를 컨트롤하는건 불가능하다는걸 영화에서 보여준다. 일반인이 아무리 생각을 짜내어도 천재의 지능과 신체능력을 따라잡을 수 없다. 

이 소설은 두 영화가 담는 초천재의 양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며칠차이로 좀더 똑똑한 레이놀즈가 그레코를 이기고 세계정복(?)을 할것이 암시된다. 
타노스같다. (타노스는 공리주의와 생명윤리를 설명하기에 더없이 좋은 교보재)

레이놀즈는 본인이 희망하는 이상의 세계를 위해 살인을하고 사람을 체스판의 말처럼 조종을 할것이다. 그것은 세계의 번영이라는 이상향을 위해 정당화 될 수 있는가? 

타노스는 과연 악당이었는지 다시한번 생각하게 된다. 

<0으로 나누면>
우선, 이 소설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사실에 기반을 둔 이야기 이고 작가가 상상력으로 창조해낸 이야기인지 또다시 헷갈리며 혼란이 몰려온다
1=2이고, 이것을 증명했다는것 자체가 거짓(즉 상상) 이다. 무던히도 수학논증을 이해하려고 애쓰며 소설을 따라갔지만, 두번을 읽고 나서야 르네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한 신학자의 좌절. 

<일흔두글자>
(내용의 이해가 어려워서 아무래도 번역이 잘못된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
사물에 개별적인 특성이나 능력을 나타내는 적합한 이름을 부여하면, 그 사물은 특성을 발현하게 된다는 명명학이 있다. 기술이라는게 결국은 이름을 찾는것으로 귀결되고 과학, 기술, 종교 등 모든 연구가 이름과 연관되어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건강한 정신상태를 가진 건강한 사람들이 왜 중요하고, 인문학과 철학이 과학보다 중요한 이유가 드러나는듯 했다. 

줄기세포 연구에 왜 강한 윤리적 잣대를 들이대는지, 생명과학이 급속도로 발달하는 상황에서 어디까지 연구를 허용할 수있는지 고민이 되었다. 
다행이도 우리의 주인공은 어쩜 이렇게 똑똑하면서도 정의롭고 인류애가 넘치는 건강한 학자이다.  - 인문학 공부를 하였나? 

신이 창조한 인간은 5세대면 종말에 이르는데, 
한번 자명이 날인되면 인간은 자기복제를 할수 있게되고, 종말하지 않는다. 신도, 정부, 권력도 아닌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 출산을 결정할수 있게된다. 권력과, 종교보다 과학이 승리하는 뼛속까지 과학자인 과학자의 소설다운 결말이었다.

<인류과학의 진화>
25년전 마지막 논문이 제출된 이래 메타인류와 인류의 갭이 급격히 커지고, 더이상 인류에게 과학이 의미가 없어졌다. 이에 인류는 메타인류의 과학을 해석하거나 아니면 과학을 포기하거나 하는방식으로 대처하였다. 하지만, 마지막에서 인류과학의 독창성의 가능성을 제기하고, 메타인류의 본류가 인류였음을 강조한다. 

위기도아니고, 극단적으로 힘든 상황도 아니다. 단지 과학연구의 필요성이 사라진 과학의 희망이 없는 상태. 희망과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 과학자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설명을 해주는 희망의 등불을 제시하는 것 같다. 

<지옥은 신의 부재>
창작노트에서 욥의 이야기에서 고난 극복이후 다시 축복을 받는것이, 욥의 진정한 신념을 희석시킨것 같다고 느끼는 저자의 생각이 조금은 놀라웠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신의 축복을 인간의 영달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기성교회에 동의하지 않던 내 기존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욥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보고나서야 왜 천사의 강림은 축복만을 내리지 않는건지, 닉이 신을 사랑하지만 지옥에 갔는지 알수 있었다. 천사는 갑자기 나타나 어떤사람에게는 축복을, 어떤사람에게는 재앙을 내리고 사라진다. 진정한 신앙을 가진자는 축복과 불행에 좌우되지 않으며, 내가 어디에 있는지도 내 신앙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저자는 p359~362에 본인이 원하는 대로 욥기를 다시 써서 닉을 지옥에 보내고, 신에 대해 정의를 내렸다. (p362 신을 사랑하고 싶거든, 신의 의도가 무엇이든 간에 그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어햐 한다는 것이다. 신은 의롭지 않고, 친절하지도 않고, 자비롭지도 않다. 그리고 그런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신앙심을 갖추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그리고 지옥에서의 닉의 모습을 통해 무조건적인 사랑과 진정한 신앙에 대해 이야기 한다. 소설의 형식으로 저자가 새롭게 성경을 써내려간 듯 하다.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소고>
외모지상주의에 대항하여 '칼리'를 장착하고 외모지상주의에서 자유로워진다는 발상이 신기하고 놀랍다. 
이성적 판단력에 영향을 끼치는 외모라는 제3의 변수를 차단하여 진정으로 자신의 의지와 생각을 토대로 판단을 할 수 있다는건 한편으로 매력적이다. 하지만, 인공적인 조치를 통해 외모의 영향을 차단하는게 과연 타당한 것인가? 
칼리 의무화를 통해 사회전체 효용이 상승하고, 개개인의 삶의질, 이성적 판단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경우 의무적으로 인간의 의식을 통제하는것이 타당할 것인가? 

그리고 소설은 다른 한편으로 발달된 과학기술의 인지조작의 문제를 제기한다. 사실 칼리의 문제보다 인지조작의 문제가 더 심각하고, 당장 우리의 현실속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게 좀더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백화점이나 마트의 상품 진열, 유튜브의 관심있는 영상 목록 등 이미 많은곳에 빅데이터와 기술이 상업화와 손잡고 개인선호를 유도하고, 소비와 선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p420에서 '그런 사람들은 현실조차도 왜곡할 수 있는 일종의 오라를 발산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그 어떤일도 거의 믿어버리도록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동하고, 기꺼이 지갑을 열려하고, 상대방의 요구에 무조건 동의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음조 실인증과 표정을 판독하지 못하는 실인증을 채택한다면 어떤 종류의 조작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다고 한다. '연설을 들어도 순수하게 그 내용만으로 연설을 판단하게되고, 그 이외의 연출은 전혀 자각하지 못한다'라고 알려준다.
인지조작이 만연한 사회에서 어쩌면 칼리는 개인의 자율성과 선택권을 보호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일지도 모른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방식이든 결국 뇌에 조작을 가하는게 바람직한게 아닌가라는 결론이 왠지 모르게 씁쓸하다.

P.S. 창작노트가 있어서 책을 읽으면서 떠올랐던 '이 이야기는 성경에 기반을 둔 것인가?', '어떻게 작가는 이런생각을 할 수 있지? 그 계기는?' '이런 결말을 만든 이유는 뭐지?'와 같은 궁금증이 일부 해소될 수 있었다.